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Music/모차르트

[모차르트]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생애 - 오페라로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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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페라 후궁에서의 도주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이후 4년 동안 오페라 작품을 거의 쓰지 않았고 두개의 미완성 작품들과 1악장짜리 Der Schauspieldirektor(오페라 감독이란 뜻)를 창작했습니다. 모차르트는 그 대신 자신의 피아노 독주자로서의 경력, 협주곡 작곡가로서의 경력에 집중하였습니다. 1785년말엽, 모차르트는 건반곡 작곡에서 떠나 그의 오페라 대본작가 로렌초 다 폰테와 유명한 오페라 협업을 시작합니다.

 

 

 

 

1786년에 비엔나에서의 피가로의 결혼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. 프라하에서는 반응이 더 뜨거웠습니다. 이에 고무된 모차르트는 두번째로 다 폰테와 협업하였고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완성하여 1787년 10월에 프라하에서 초연하였습니다.

 

 

 

 

그러나 1788년 비엔나에서의 공연은 그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했습니다. 이 두개 작품은 모차르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의 대열에 들어서 있으며 오늘날에도 오페라의 레퍼토리의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. 그러나 당시에는 이 곡들의 음악적 복잡함은 청중들과 연주자들에게는 난해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. 이러한 모차르트의 발전상을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다 지켜보지 못했습니다.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1787년 5월 28일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.

 

 

 

 

1787년 12월에 모차르트는 마침내 귀족들의 후원하에 고정 직책을 얻게 되었습니다. 요제프 2세 황제는 모차르트를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했습니다. .이 직책은 그 전 달에 글룩의 죽음으로 공석이 되어 있었습니다.

 

 

 

이 직책은 파트 타임으로서 단지 800플로린의 연봉을 받는 것이었고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황궁인 Redoutensaal에서의 연례 무도회의 춤곡을 작곡했을 뿐이었습니다.

 

 

 

이 충분치 않은 수입은 모차르트에게 고난의 시기가 찾아 왔을 때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. 궁정 기록에 따르면 오제프 황제의 목적은 이 콧대 높은 작곡가가 비엔나로부터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떠나지 않게 붙잡아 두는 것이었습니다. 

 

1787년에 젊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몇주를 머물며 모차르트에게 배우기를 희망했습니다. 그러나 두 작곡가가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.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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